남주(南洲) 강성익(康性益) 전 지사

작성일
2010-02-10
작성자
운영자
조회
2748
  • 첨부파일. 등록된 첨부파일이 없습니다.

남주 강성익지사는 1890년 9월 8일 서귀포시 법환동 294번지에서 아버지 강안홍(康安弘)씨와 어머니 유유생(兪酉生)씨 사이에서 3남1녀중 장남으로 어났다.

본관은 곡산 강씨이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고 다부진 남주선생은 낮에는 사일을 하고 밤에는 한문공부를 하며 부지런히 가업을 도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기대를 받고 자랐다. 성년이 되자 같은 마을에 사는 명망가 통정대부 현상원(玄尙遠)씨와 숙부인 양계해(梁繼海)씨의 따님 현인생(玄寅生)과 결혼하여 슬하에 2남5녀를 낳았다. 부인은 일제시 의생을 지내고 한학자로서 해방후 초대 서귀면장을 지낸 현지준(玄至濬)씨의 누이동생이며 한국 서예계의 원로인 소암(素庵) 현중화(玄中和) 선생의 고모이기도 하다. 남주 선생은 어려운 농촌에서 태어나 근면과 검소를 생활신조로 삼고, 무언가 장래성이 있는 새로운 일을 찾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사업으로 1918년에 통조림공장과 자개 단추공장을 설립하여 기업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6년에는 서귀포~모슬포, 서귀포~성산간을 운행하는 제주남부자동차회사를 설립하였고, 1927년에는 전라남도 통조림조합 이사로 취임하였다. 1930년에는 전라남도 수산회의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34년에는 제주세무서 소득조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에는 서귀금융조합장으로 선임되었고, 1937년에는 전라남도 평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38년에는 제일전분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제주도에서는 처음으로 고구마를 원료로 하여 전분을 생산함으로써 제주도민의 농업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 1939년에는 소화운송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선출되었으며, 1942년에는 서귀포상공회의소 소장으로 취임하여 천지연에 수력발전소를 유치하기 위하여 수력발전소 부지를 쾌히 희사하기도 하였다. 1941년에는 제주산업주식회사의 취체역으로 선임되었으며, 1943년에는 제주자동차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제주도 전역의 일주도로를 버스가 운행하게 하였다. 1950년에는 서귀포 어업협동조합장에 피선되었고, 동년 5월 19일에는 남제주군수로 임명이 되어 1953년 9월 15일까지 3년 4개월동안 군수로 재임하면서 남제주군의 발전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 남주선생이 남제주군수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효돈초등학교에서 사용하는 실습지를 일정시 지주들이 강제로 수용되었다하여 해방이 되자 다시 찾아 농사를 짓기시작하였다. 그 때 본인이 효돈교감으로 부임하여 이 사실을 확인하여보니 지주들이 연명으로 매도증서를 작성하여 정식으로 매도한 서류가 발견되었다. 이 서류를 첨부하여 남제주군 농지위원장을 겸임하고 있는 남제주군수에게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그 때 남주선생은 남제주군 농지위원회를 긴급소집하여 심의에 들어갔다. 지주들이 출석하여 항변하고 반발도 하였으나 농지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효돈교실습지로 환원결정을 내렸다. 그 회의에서 남주선생은 의연한 태도로 나도 일제시 서울대학교 약초원 (현 토평동 제주대학교 식물원) 부지를 희사하였는데 이제와서 억울하게 강제수용 되었다고 하여도로 찾아야 하겠느냐 말도 되지않은 소리를 하지 말라고 일갈하는 생전의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떠오른다. 1955년 4월 9일에는 중등교육의 요람으로 남주학원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956년 9월 5일에 남주고등학교를 개교하면서 제주대학장을 지낸 사위 김계용(金繼鏞)을 초대교장으로 임명하였다. 1960년 12월 29일에는 4․19후민주당 정권때 민선 제주도지사 선거에 무소속으로 입후보하여 김선옥, 김영진, 양남전, 양제박 등 5인이 경합하는 가운데 여당 후보인 김선옥을 누르고 23,673표를 얻어 당당히 초대 민선 제주도지사로 당선이 되었다. 남주선생이 제주도지사로 취임하여 내건 도정목표는「 대제주건설」이었고 도정방침으로는 1) 사회안정, 2) 행정기강확립, 3) 축산개발이었다. 그리고 중요시책으로 1) 농업진흥, 2)임산개발, 3) 특용작물개발, 4) 해상교통원활화를 강조하였다. 특히 제주도와 전라남도 완도 간의 해저터널을 건설하여야 한다고 역설한 것은 제주도의 먼 장래를 내다본 선견지명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같은 남주선생의「 대제주건설」이라는 도정목표도 1961년 5․16이라는 군사혁명이 일어나면서 그 뜻을 펴지 못한 채, 1961년 5월 23일 도지사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민선 도지사직을 사임한 남주선생은 오로지 남주학원의 발전을 위하여 심혈을 기울이며, 1966년 12월 19일에 남주중학교의 인가를 받고 1967년 3월 10일에 개교함으로써 남주학원은 명실공히 중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이 외에도 남주선생은 해방 후 1946년 제주도를 전라남도로부터 독립시켜 제주도로 승격하는데 헌신적으로 노력하였고, 1948년에는 대한국민회 남제주군 위원장을 맡아 도민화합을 위하여 힘썼다. 그리고 1950년 제5대 남제주군수 재임시에는 4․3과 6․25의 혼란속에 군민과 피난민 구호대책에 사재를 털어 구호활동을 펼쳤음은 물론 군민의 생활안정과 사회질서 확립에 총력을 경주하였다. 남주선생은 특히「 대제주건설」이라는 포부를 내세워 한라산 횡단도로(현 5․16도로) 건설의 추진과 제주국제공항의 확장을 위해서도 남다른 노력을 하였다. 남주선생은 평소 큰 포부와 강인한 의지로 근검역행(勤儉力行)을 실천하여,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의욕적으로 활동하면서 괄목할 업적을 남긴 제주가 낳은 선각자이다. 제주의 대표적 사업가로서 자수성가한 부호로서 산북 제주시에는 박종실(朴宗實)씨가 있고, 산남 서귀포에는 남주 강성익(康性益)씨가 있다고 제주도민들은 존경과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남주선생은 기업가, 교육사업가 또 목민관으로서 모든 일을 정열적으로 추진하여 왔는데 천명은 어찌할 수가 없었는지 1968년 12월 8일에 78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유가족으로 장남인 강치남(康治男)은 좌신자(左信子)와 결혼하여 선친의 유지를 받들고 학교법인 남주학원의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여 육영사업에 전력하고 있다. 그 외로도 한국사립학교중고법인협의회 초대 도회장과 민주평화통일자문위원, 제남신문사장, MBC 제주방송국자문위원, 서귀포시정자문위원 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도 활발하게 하였다. 차남인 강욱(康勖)은 강숙자(姜淑子)와 결혼하여 서귀포시의원을 거쳐 남주학원 상임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따님들도 다 훌륭하여 장녀 강민현(康民賢)은 장인을 도와 제주자동차회사의 전무와 전분공장을 경영한 오남일(吳南一)의 부인이며, 2녀 유정(有貞)은 초등학교교장을 지낸 임계덕(任桂德)의 부인이다. 3녀 유량(有良)은 제주대학장을 지낸 김계용(金繼鏞)의 부인이며 4녀 유경(有慶)은 한일은행 지점장을 지낸 문종훈(文鍾訓)의 부인이다. 5녀 금희(今熙)는 국회의원과 농림수산부장관을 지낸 강보성(姜普性)의 부인이다. 이와 같이 여러 자녀와 사위를 비롯하여 내외손 모두가 화목하고 번성하여 잘 살고 있다.

이전글
오봉조 훈장과 그 문화생들
다음글
다음글이 없습니다.